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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당안국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기록 선집 발표, 제2부-- 일본측의 당시 형성된 자료

출처: 중국국제방송국 | 2015-08-18 15:25:22 | 편집: 동소교

    제4부는 관동 헌병대의 "통신검열월보"에 기재된 일본군인 서한에 반영된 일본군의 "위안부" 노역 죄행(1941년)으로 길림성 당안관에서 제공했다. 일본군은 점령구에서 아주 엄격한 서한 검사제도를 채용했다. 재 중국 일본군과 가족 사이의 서한은 헌병대 검사관에 의해 비밀리에 개봉되었으며 전장의 진실한 상황을 기록하거나 "군심에 영향을 줄 수 잇는" 서한이라면 소각되었다. 그러나 소각되기 전에 검사관은 서한 내용을 베껴서 서류로 남겼다. 서류로 남긴 이런 서한에는 일본군의 "위안부" 노역 그리고 "위안소"의 구체적인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편지 한통은 개봉(开封) 주둔 일본군 제84야전군 와타나베(渡边)부대의 토무라 에이유우(户村英雄)가 소화 16년(1941년) 2월 1일 도쿄 요시다 호(吉田保)에게 보낸 서한 절록에 속한다. 이 편지는 군대가 관리하는 "위안소" 그리고 "위안부"가 부대를 따라 이동하는 특수한 생활상태를 기록했다. 서한은 "소각" 처리되었다. 즉 서한에 있는 "위안부" 내용이 "뚜껑"을 열었기 때문이다.

    편지 다른 한건은 개봉에 주둔하는 하라다(原田) 부대 겐죠(见城)부대 하기와라(萩原)부대 본부 키타호리 코우치(北堀考治)가 소화 16년(1941년) 사이타마(埼玉)현 히키(比企)군 미야마에(宫前)촌의 코바야시 노기쿠(小林菊野)에게 보낸 서한의 절록으로, 젊은 일본군인이 동정 유지를 바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지만 부대에서 자포자기하고 군대 전투지역의 "위안소"에서 조선 "위안부"를 찾아 쾌락을 추구하다가 나중에 성병에 걸린 기형적인 생활상태와 마음가짐을 반영하고 있다. 서한은 "제거" 처리된다. 즉 서한에서 해당 "위안부" 내용을 "삭제"하는 것이다.

    제5부는 "헌병월보"에 기재된 인도네시아 쟈바에 군대 "위안소"를 설립한 당안(1943년 3월 5일)으로 길림성 당안관에서 제공했다. 1944년 3월 5일, 일본 쟈바헌병대 본부 "헌병월보(1월)"은 제3선박국 군가족이 허용을 받지 않고 군대 "위안소"에서 쾌락을 추구하였으며 욕야카르타(日惹) 철도공장 일본군 고용인원이 술 뒤끝에 군대 "위안소"에서 "위안부"를 구타하고 쟈바 주둔 27비행여단의 한 일본 육군병사가 술 뒤끝에 군대 "위안소"에서 "위안부"를 구타하고 돗보(独步)1567부대 본부 육군 1등병이 군대 "위안소"에서 쾌락을 추구한 등 상황을 기록하고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쟈바에 군대 "위안소"를 설립한 사실을 까밝혔다.

    제6부는 일본군 위안소 경영 등 상황에 대한 정보(1944~1945)로 내몽고자치구당안관에서 제공했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하이랄(海拉尔), 만주리(满洲里)의 헌병대 등 일본군 위안소 경영 상황을 기록한 정보이다.

    일본 관동헌병대 하이랄 분대의 다마무라(玉村) 헌병보가 수집한 정보는 하이랄시 위안소의 영업상황을 기록하고 있는데, 군비부족으로 위안소 경영이 잘되지 않고 있었다.

    이케우치(池内)병조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군대 위안소의 설치로하여 하사 장병들이 지방식당을 찾아가는 흥미가 줄어들었으며 차강에 주둔하는 일본군 1백여명이 만주리에 주둔하는 부대와 함께 2백여명이 군대 위안소에 집중되었다.[글/신화사, 번역/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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