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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당안국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기록 선집 발표, 제2부-- 일본측의 당시 형성된 자료

출처: 중국국제방송국 | 2015-08-18 15:25:22 | 편집: 동소교

    

(자료 사진)

   중국 국가당안국은 16일 공식사이트에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당안 선집" 제2부--"일본측이 당시 정리한 자료"를 발표했다.

    제2부에는 6부의 자료가 망라했다.

    제1부는 일본군 화중(华中)파견 헌병대의 "남경헌병대 관할구 치안회복상황에 대한 조사보고(통첩)"(1938년 2월 19일)로 길림성 당안관에서 제공했다. 이 당안은 소화 13년(1938년) 2월 19일 일본군 화중파견대 사령관 오오끼(大木繁)의 "남경(南京)헌병대 관할구 치안회복상황에 대한 조사보고(통첩)"에 속하는데, 소화 13년 2월 1일부터 10일까지의 남경과 주변지역 각 시, 현 군대의 "위안시설" 상황을 종합했다.

    이 가운데는 남경, 하관(下关), 구용(句容), 진강(镇江), 금단(金坛), 상주(常州), 단양(丹阳), 우호(芜湖), 녕국(宁国) 등 여러 지역 일본군의 수량, "위안부"의 인수, "위안부" 1인에 대응하는 병사 숫자, "위안부"의 구성, 10일내에 "위안소"를 이용하는 병사 인수 등 상황을 망라했다. 당안의 기재에 따르면 일본군은 침략부대에 비례 있게 "위안부"를 배비했다. 남경 당시의 일본 주둔군은 2만 5천명이었으며 "위안부"는 141명으로 "위안부" 1명이 상대해야 하는 병사가 178명이었다.

    제2부는 일본군 화중파견 헌병대의 "남경헌병대 관할구 치안회복상황에 대한 조사보고(통첩)" (1938년 2월 28일)으로 길림성당안관에서 제공했다. 이 당안은 소화 13년(1938년) 2월 28일 일본군 화중파견 헌병대 사령관 오오끼의 "남경헌병대 관할구 치안회복상황에 대한 조사보고(통첩)"에 속한다. 보고는 도합 12개의 내용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서 제11조항은 서식 형식으로 남경헌병대 관할구 각 시와 현 군대의 "위안부시설" 상황을 종합했다. 서식의 종목은 2월 29일의 보고 서식과 기본상 같았다.

    서식에서 우호의 "위안부"가 10일내에 84명 늘어났으며 109명의 "위안부" 가운데 중국인 "위안부"가 25명, 조선인 "위안부"가 36명으로 우호의 "위안부" 총 숫자의 1/2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강에서 2월 중순 "위안소"에 진입한 일본군은 8,929명으로 상순의 5,734명보다 3,195명 늘어났다. 당안은 또한 단영에서 2월 중순 "위안부" 1인에 대응한 병사는 267명이며 "위안부"가 적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위안부"를 모집해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3부는 일본군 북지나(北支那)헌병대의 "위안소의 설비증가 등 문제에 대한 보고(1943)"으로 하북성(河北省) 진황도시(秦皇岛市) 당안관에서 제공했다. 대량으로 "위안부"를 "이용"했고 또 "위안부" 생존상태가 열악했기 때문에 그중 적지 않은 "위안부"가 성병에 걸리고 일본군에 전염시켰다. 일본군 북지나 헌병대의 "위안소의 설비증가 등 문제에 대한 보고"에 따르면 "성병으로 인한 독해는 아주 심각하여 전투력을 소모시켰다." 그리하여 "위안소는 반드시 제거설비와 용구를 장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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