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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日 전쟁 고아의 역경과 희망…“역사를 알리는 것이 나의 마지막 사명”

출처: 신화망 | 2018-12-13 14:56:40 | 편집: 박금화

[신화망 서울 12월 13일] 오늘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살해된 난징(南京)대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중국의 국가추모일이다. 전장은 인류의 선(善)과 악(惡)이 점철된 가장 비극적인 현장이다. 그러나 원한과 증오로 가득 찬 그곳에 전쟁이 낳은 또 하나의 인생이 자리잡고 있다. 다큐멘터리 ‘하유차생(何有此生·나에게 이 생이 주어진 이유)’에서는 국경을 넘어 인간의 선한 마음이 이뤄낸 하나의 기적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중국 동북지방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는 일본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일본인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7명의 양부모를 만났고, 6개의 이름이 주어졌다. 나카지마 요하치(中島幼八)라는 이름 외에도 인생의 전환점을 지날 때마다 라이푸(來福), 천칭허(陳慶和), 리청린(李成林), 자오청린(趙成林) 나카지마 시카(中島思華·‘思華’는 ‘중국을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내 속에는 일본인의 피가 흐르지만, 내 몸을 채운 것은 중국인의 살”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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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당시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일본 개척단’이던 부모를 따라 중국 동북지방으로 왔다.

어린 시절의 나카지마 요하치와 누나 미츠코.

일본 패전 후 중국 농민에게 구조되어 가까스로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그는 이후 양어머니와 양아버지 세 명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나카지마 요하치(우측 첫 번째)와 양어머니 쑨전친(孫振琴), 세 번째 양아버지 자오수썬(趙樹森).

첫 번째 양아버지 천위구이(陳玉貴) [나카지마 요하치 畵]

중국 농촌에서 글을 모르는 양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던 시절에는 ‘라이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양어머니 쑨전친과 두 번째 양아버지 리시원(李希文).

산파(産婆)였던 양어머니는 딱한 처지에 놓인 이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힘들던 시절, 가장 평범하고 순박했던 중국인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땅에 조금씩 사랑과 평화의 씨앗을 심었다.

다큐멘터리 <하유차생>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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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후에도 ‘침략자의 후손’이라는 낙인은 ‘라이푸’의 마음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14세 때의 나카지마 요하치.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그는 일본에 있는 생모의 부름도 줄곧 거절했다.

중국적십자총연맹이 생모에게 보낸 답신.

훗날 한 중국인 선생으로부터 “일본 국민들도 침략 전쟁의 피해자이며, 일본에 가면 양국 관계 개선에 기여할 수 있을 것”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어린 시절의 아픔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16세였던 그는 혼란한 시국 속에 양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할 틈도 없이 고아들을 돌려보내던 마지막 배편에 올라탔다. 15년 전 그와 누나, 친부모를 중국으로 실어 보냈던 바로 그 하쿠산마루 호였다. 멀어지는 부두를 보며 그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가는 슬픔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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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내리자 생모가 그를 맞았다. 모자(母子)는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생모는 꼭 잡은 그의 손을 다시는 놓지 않았다.

나카지마 요하치와 생모 나카지마 키요에(우측 첫 번째).

그녀는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아들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중국에 있는 양어머니 또한 평생 자신을 떠나간 아들에 대한 그리움 속에 살았다. 그렇게 육신이 태어난 조국과 감정의 뿌리가 있는 고향 사이에서 그는 두 어머니의 모성과 눈물로 일생을 버텨 냈다.

그는 “‘라이푸’로 살던 어린 시절엔 ‘나카지마 요하치’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썼지만, 76세가 된 지금은 ‘라이푸’로 살던 그 때가 자꾸만 그리워진다”라고 털어놓았다. 혼자서 동북지방식 대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연금을 털어 ‘일본인 중국 잔류 고아’의 발자취를 담은 전시회를 여는가 하면, 전시를 위해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중국에서 대두·수수와 옥수수 속대를 운반해 오기도 했다. 중국에 홀로 남겨진 지 15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그 후 다시 중국 땅을 밟기까지는 무려 6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는 지금도 바다 너머에 있는 ‘마음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하유차생>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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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 요하치는 평생 중일 관계 개선 사업에 몸 바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중국의 은혜에 보답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전후 70주년을 기해 중국어와 일본어로 출간한 자서전 『하유차생』이다. 그는 책 속에서 중국의 양부모님과 마을 사람들, 선생님, 친구들을 비롯해 어려웠던 세월 속에서 그가 받았던 따뜻한 관심과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자세히 언급했다. 책이 출간된 뒤 그는 비행기와 기차, 트랙터를 타고 어린 시절 소를 풀어 기르던 산비탈과 옥수수밭을 지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담긴 고향마을 양부모님의 산소 앞에 도착했다.

개인의 삶은 전쟁에 짓밟혔지만, 그에게는 늘 전쟁의 참화를 알려야 한다는 무거운 역사적 사명감이 있었다. 그는 이 책이 자신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최대의 유산이라 말한다.

다큐멘터리 <하유차생> 스틸컷.

2015년 8월, 일본을 다시 전쟁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안보법(安保法)’ 법안 통과에 항의해 도쿄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나카지마 요하치 씨도 이들 중 하나였다.

평화를 동경하는 인류의 마음은 시공간과 국경을 초월한다.

일본 안보법안 통과 강행 결사 반대 시위 현장.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국에 남겨진 일본인 고아는 4천 명에 달했고, 이들을 거둬 키운 중국인 양부모는 1만 명이 넘었다. 그 중 전쟁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동북지방에 잔류 고아 수가 가장 많았다. 이렇게 남겨진 이들은 하나같이 “일본은 나의 조국이지만, 중국은 나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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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오늘 중국은 난징대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국가추모일을 맞았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어떤 원한이나 증오 때문이 아니라, 무한한 꿈과 가능성을 지닌 개인의 삶이 다시는 전쟁이라는 비극에 짓밟혀 스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를 담아 독자들에게 나카지마 요하치 씨와 그가 걸어온 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하유차생’을 소개한다.

다큐멘터리는 전쟁의 아픔과 원한을 딛고 진정한 평화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촬영은 나카지마 씨가 태어난 고향과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좇아 양국 각지를 오가며 진행됐다. 제작 기간만 3년이 걸렸다. 구수한 중국 동북지방 사투리를 구사하고 중국 노래를 부르며 자신만의 레시피로 만든 요리를 선보이는 나카지마 씨는 시청자에게 유쾌한 웃음과 뭉클한 감동, 때로는 가슴 아픈 사연과 눈물을 선사한다. 수없이 많은 인생의 굴곡과 불행을 겪었지만 그는 중국의 여느 농민들처럼 밝고 소박하며, 무엇보다 강인하다.

‘하유차생’, 즉 ‘나에게 이 생이 주어진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침략 전쟁으로 어린 시절 고향을 잃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다행히 마음씨 좋은 이웃들을 만나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그렇게 어른이 됐다. 나에게 이 생이 주어진 이유는, 일생을 평화에 몸 바치며 그들이 심은 선행의 씨앗에 보답하기 위해서이다. 비극적인 침략 전쟁으로 집과 가족을 잃었지만 전쟁 상대국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이에게는 자신이 겪은 역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이미 필생의 사명처럼 된 지 오래다. 전쟁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실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하유차생’

원한과 아픔을 딛고 역사를 기억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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