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황금이 악몽으로...이라크, 석유 카르텔 맞서 진정한 독립 위해 고군분투-Xinhua

검은 황금이 악몽으로...이라크, 석유 카르텔 맞서 진정한 독립 위해 고군분투

출처:신화망 한국어판

2024-07-31 14:22:35

편집: 朴锦花

 

[신화망 바그다드 7월31일] 후세인 알리 사에드(81)는 석유 매장량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이라크 북부 도시 키르쿠크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은퇴한 이라크 석유 노동자의 눈에 비친 고향은 유전 위로 화염이 치솟고 은빛 송유관이 이쪽 끝에서 저 멀리까지 뻗어 있는 모습이다.

후세인은 "석유 때문에 전 세계가 이라크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며 "내 평생 석유와 관련된 삶을 살았고 조국의 운명도 석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검은 황금에서 검은 악몽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패망한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점령한 바그다드∙바스라∙모술 지역을 통합해 이라크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위임 통치했다.

1921년 8월, 파이잘 1세가 영국의 지원을 받아 바그다드에서 서둘러 왕위에 올랐다. 자체 국가도 없어 영국 국가인 '하느님, 국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God, Save the King)'를 부르며 대관식이 거행됐다.

1927년 영국∙네덜란드를 비롯한 몇몇 서방 석유 회사들로 구성된 공동 탐사팀이 키르쿠크의 바바 구르구르 유전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후세인은 "영국인이 왔을 때 키르쿠크는 성냥을 긋기만 해도 공기 중의 먼지에 불이 붙을 정도로 검은 황금의 도시였다"고 말했다.

그들은 로열티로 석유 1톤(t)당 4실링만 이라크에 지불했다. 이는 당시 원유 1톤 가격의 12.5%에 해당하는 것으로 식민지 개척자들의 탐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구인들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키르쿠크에서 지중해까지 송유관을 건설했다. 이는 당시 세계 최장 송유관 프로젝트로 연간 400만 톤 이상의 석유를 유럽으로 운송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라크 팔루자의 부서진 건물을 지난 3월 12일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신화통신)

그들은 이라크에 상업용 정유 공장을 설립하지 않고 현지에서 석유를 기반으로 한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았으며 기술 공유도 거부했다. 그 결과 이라크는 막대한 석유 자원을 보유했음에도 석유 제품을 수입해야만 했다.

후세인은 "이라크는 가시를 먹으면서 금을 나르는 낙타와 같았다"며 한탄했다. 이어 "막대한 부가 서방으로 흘러들어갔다"며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 모두 지분을 가져갔지만 이라크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부연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서방 열강은 새로운 규칙을 정하기 시작했다. 1928년 미국, 영국, 네덜란드의 세 거대 석유기업이 비밀 회동을 하고 세계 석유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아크나캐리 협정(Achnacarry Agreement)을 맺었다. 1930년대에는 서방 석유기업 4곳이 추가로 합류해 석유 카르텔인 세븐 시스터스(Seven Sisters)를 설립했다.

이 거대 기업들은 석유 생산∙운송∙가격∙판매를 통제하는 식으로 석유 산업을 독점했다. 1913~1947년 서방 석유기업들은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의 산유국으로부터 37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지만 로열티로 지불한 금액은 5억1천만 달러에 불과했다.

후세인은 "검은 황금이 서구의 황금기를 이끌었지만 이라크에는 검은 악몽이 됐다"며 "우리 입장에선 차라리 석유가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가끔 든다"고 말했다.

국가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

20세기 중반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반식민지 투쟁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수많은 국가가 독립을 쟁취했다. 이에 영국의 통제 아래 있던 파이잘 왕조의 꼭두각시 정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이라크는 궁핍한 나라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모두가 가난과 굶주림 속에 살아갔죠. 이런 상황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후세인은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1958년 7월 14일 바그다드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압둘 카림 카심이 쿠데타를 일으켜 파이잘 2세를 전복시키면서 이라크 공화국이 수립되고 영국의 통치가 종식됐다.

'빼앗긴 부를 되찾자!' 새 공화국은 석유 식민주의 종식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1959년 이라크는 국가 석유 업무를 관리하기 위해 석유부를 설립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븐 시스터스는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80% 이상을 장악하며 유가를 조작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이라크는 제3세계 국가들과 동맹을 모색했다. 1960년 9월, 이라크의 초청으로 바그다드에서 만난 베네수엘라∙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이란 대표는 회원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안정적인 석유 시장 가격을 보장하기 위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설립했다.

1972년 6월 1일 이라크 국영석유회사(INOC)가 서방이 지배하던 이라크석유회사(IPC)를 국유화하면서 쿠웨이트∙베네수엘라∙사우디아라비아 및 기타 국가로 국유화 물결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1973년 10월 중동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 국가들에 석유 금수 조치를 발표했다. OPEC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가 결정권을 되찾아 12월 유가를 배럴당 5.12달러에서 11.65달러로 올렸다.

2022년 9월 5일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 (사진/신화통신)

석유 파동으로 인해 서방에서는 석유가 물보다 저렴했던 황금기가 막을 내렸다.

유가가 치솟으면서 이라크는 급속한 발전의 시기를 맞이했다. 392달러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석유 국유화가 시작된 1979년에 2천858달러로 급증했다.

"경제∙사회∙과학∙문화가 모두 번성했습니다. 교육과 의료도 보장받았죠. 임금이 인상되고 저축이 늘어나자 많은 가정에서 자동차를 구입하고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떠났습니다." 후세인은 번영했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2003년 3월 20일 바그다드 상공에 공습 사이렌이 울리며 어둠이 또다시 이라크를 뒤덮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는 "우리는 이라크에서 위협을 제거하고 이라크 국민에게 통치권을 되찾아주는 것 외에는 어떤 야망도 없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침공 사실을 알게 된 후세인과 그의 동료들은 석유 생산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불태웠다.

후세인은 "우리가 없애지 않았다면 미국인들이 반드시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세인의 이런 본능은 이라크가 겪어온 과거의 고통에서 비롯됐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이라크 전쟁이 결국은 석유 때문이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나 이를 인정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불편하다는 점이 슬픕니다."

후세인은 "역사가 반복되는 것 같다"며 "미국의 침공으로 10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미군 병사가 2004년 11월 20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파손된 차량 근처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사진/신화통신)

1970년대 미국의 경제 지배력이 쇠퇴하고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하면서 달러는 금에서 분리됐다. 미국은 달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달러를 석유와 연계한 페트로달러 시스템을 구축했다.

2000년 이라크는 석유 거래를 달러에서 유로로 전환하면서 페트로달러 시스템에 위협이 됐다. 2003년 이라크 침공 후 사담 후세인 정부가 몰락하자 미국은 석유 수출 시 달러 거래로 복귀할 것을 이라크에 지시했다.

미국의 침공으로 이라크는 황폐화됐다. 후세인은 "기본 생활 수준이 무너지고 연금이 줄었으며 노인들은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했고 때로는 식량 공급마저 불확실해졌다"고 토로했다.

2011년 미군이 철수한 후 경제적으로 침체되고 정치적으로 분열된 이라크는 테러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과 폭력으로 2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9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석유는 이라크인들에게 행복의 원천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 세기가 넘도록 석유는 이라크에 저주가 됐습니다." 후세인의 말이다.

◇글로벌 사우스와의 파트너십

오늘날에도 석유는 이라크의 경제 생명줄이다. 2022년 세계은행은 석유 매출이 지난 10년간 이라크 수출의 99% 이상, 정부 예산의 85%, GDP의 42%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이라크가 진정한 번영과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를 다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2023년 이라크는 지난 수십 년간의 전쟁과 위기에 시달려온 국가 경제를 살리고자 170억 달러 규모의 철도 도로망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남부 해안의 주요 항구를 철도∙도로로 튀르키예 국경까지 연결시키는 것이 골자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석유 의존도를 낮추려는 의지뿐만 아니라 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을 강화하려는 이라크의 결심을 보여준다.

2023년 9월 이라크 바스라와 이란의 국경도시 샬람체를 잇는 철도 프로젝트가 착공됐다. 올 4월 이라크는 튀르키예∙카타르∙아랍에미리트와 도로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4자간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제 키르쿠크에 새로운 도로가 깔리고 교통수단이 개선될 것입니다." 후세인은 "이는 이라크 재건의 시작"이라며 "앞으로의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강조했다.

원문 출처:신화통신 한국어 뉴스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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