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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망 베를린 6월 26일] (쉬양(徐揚), 위안솨이(袁帥) 기자) 독일 본에 있는 베른트 게릭(Bernd Gehrig)의 집에 들어서면 중국 스타일의 인테리어 소품이 한눈 가득 들어온다. 다양한 중국 도자기병과 중국 산수화를 보면 이 집이 중국과 인연이 있는 집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거실의 눈에 띄는 곳에 점퍼를 입고 안경을 낀 인자한 노인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놓여 있다. “이 분이 저희 아버지세요”라고 게릭은 말했다.
중국 개혁 개방 후 초빙된 첫 ‘외국인 공장장’인 게릭의 아버지는 후베이 우한에서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겨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1984년 독일의 은퇴한 마이스터 관리기관 SES(Senior Experten Service)에서 파견된 당시 64세의 퇴직한 엔지니어였던 게릭의 아버지는 혼자 중국에 왔다. 당시는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아버지의 중국에서의 일과 생활에 대해 게릭은 제 때 알 수 없었다. “독일 신문을 보고 아버지가 중국의 한 국유기업의 공장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정말 믿기지 않았어요”라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게릭의 아버지는 우한 디젤기관 공장에서 2년간 공장장으로 일했다. 게릭의 아버지가 재직할 때 그가 근무하던 국유기업은 생기를 되찾아 동남아 7개국에 제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게릭의 아버지는 제품의 품질검사에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 ‘품질선생’으로 불렸다.
“당시 공장의 노동 기강에는 문제가 있었다. 제품의 질이 요구치에 도달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통역에게 인정사정 보지 말고 자신이 하는 말 그대로 통역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게릭은 “아버지는 거리낌없이 회사 측에 기업 생산관리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셨고, 수십 만 자의 제안서를 써내 경영진의 주목을 받았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외국인 공장장’은 중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오늘날 중국에서 외국인 공장장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개혁 개방 40년 후 중국에는 과거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긍정적인 변화들이 나타났다. 지금 중국의 경제발전, 산업수준, 사람들의 소양은 크게 높아졌고, 중국은 이미 자체적으로 수준 높은 관리인재를 교육시킬 수 있고, 독일에 수출하기까지 한다. “현재 중국의 도시 인프라는 미국, 독일의 어느 도시와도 비견할 수 있다”면서 게릭은 이것이 아버지에게 위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게릭의 아버지는 2003년 독일에서 별세했다. 우한 시민들은 중국인의 친구였던 게릭의 아버지를 잊지 않고 2년 후인 2005년 우한과 독일 뒤스부르크시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원문 출처: 신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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