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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역사를 회상하는 류가이롄(劉改連) 노인(3월 4일 촬영). 95세의 류가이렌 노인은 중국 산시(山西)성 양취(陽曲)현 황자이(黃寨)진에 거주하고 있다. 1943년 12월, 22세였던 류가이롄은 소탕된 일본군의 거점으로 잡혀가 유린을 당했고 그 후 집에서 은화를 치르고서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촬영/잔옌(詹彥)]
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 군국주의가 성노예제도로 추진한 암흑하고 추악하며 어지러웠던 위안부제도는 수많은 피해 여성들에게 지옥같은 고통을 던져줬다. 일본군으로부터 제멋대로의 능욕을 당해온 이 비참한 경력은 피해자들에게 평생토록 아물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시간은 흘렀고 치욕과 고통 속에 모대겼던 많은 피해자들은 끝내는 한마디 사과도 듣지 못한채 세상을 잇달아 등져갔다. 요행히 살아남아 현재까지 건재하고 있는 노인들로 말하면 그 시절 역사의 증인이 되는 것과 살아생전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는 것은 생존의 최대 의의로 된다. 최근, 기자는 산시성의 몇몇 중국 침략 일본군 “위안부” 가정을 방문하여 살아 있을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은 위안부 생존자들을 만났다. 일본군의 갖가지 폭행에 대해 말하자 그들은 여전히 한맺힌 증오를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경력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일본 정부가 역사를 직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근년래, 중국 산시, 하이난(海南) 등 지역의 위안부 생존자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저지른 일본군 죄행에 대한 성토를 줄곧 이어왔고 각계 인사들의 도움 하에 일본 정부를 고소하기 위한 여정에 선후 수차례 올라 왔다. 그러나 2007년에 중국 “위안부” 소송 사건에 대한 일본 최고 법원의 최종 판결에서는 2차 세계대전 시기 원고가 중국 침략 일본군에 의해 납치 및 폭행을 당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중국 “위안부”의 배상 요구는 기각해버렸다. “일본군이 당시 저지른 나쁜 짓은 그토록 많은데 어쩌면 사과도 안할까요?” 살아갈 날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존엄은 여전히 원하는 바이며 정의는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고 노인들은 말하면서 가령 자신이 세상과 등진다고 할지라도 자녀와 지원자들이 일본 정부에 항의를 재차 제출함으로써 당시 폭행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반성, 피해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내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원문 출처: 신화사
산시성 위(盂)현 시옌(西煙)진 시춘(西村)마을에서 거행된 위안부 피해자 장셴투(張先兔) 노인의 장례식에서 장셴투의 둘째 아들 꿔아이밍(郭艾明)이 노인의 초상을 들고 있다(2015년 11월 20일 촬영). 장셴투 노인은 2015년 11월 12일 오전에 향년 89세로 집에서 별세했다. 1995년부터 산시성의 “위안부” 생존자 대표 16명은 중일 우호 인사들의 도움으로 일본 정부를 3회나 고소하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에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위안부 16명은 그 누구도 사과나 배상을 받지 못한채 전부 별세했다. 이 16명의 노인에게 이생의 소원은 영원한 한으로 남게 되었다. [촬영/잔옌(詹彥)]
과거를 회상하는 하오쥐샹(郝菊香) 노인(3월 9일 촬영). 94세의 하오쥐샹 노인은 산시성 우샹(武鄉)현 구청(故城)진 취엔덴(權店)촌에 거주하고 있다. 1939년 4월의 어느 하루, 집에 있던 17살난 하오쥐샹은 일본군에 끌려가 위안부로 강제 징용되었다. 일본군에 근 1개월간 능욕당한 뒤, 집에서 모은 은화를 주고 풀려나올 수 있었다. [촬영/잔옌(詹彥)]
과거를 회상하는 차오헤이마오(曹黑毛) 노인(3월 4일 촬영). 94세의 차오헤이마오 노인은 산시성 위현 샤서(下社)향 치둥(七東)촌에 거주하고 있다. 1941년 가을, 일본군 거점으로 끌려가 유린당한 19세의 차오헤이마오는 임신하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바닥과 벽에 배를 부딪치는 방식으로 아이를 낙태했다. 1943년 가을, 그제서야 기회를 잡은 차오헤이마오는 거점에서 가만히 나와 몇십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촬영/잔옌(詹彥)]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피엔환잉(駢煥英) 노인(3월 8일 촬영). 올해 88세인 피엔환잉 노인은 산시성 친(沁)현 놘쵄(暖泉)촌 사람이다. 1942년 가을, 14살에 불과했던 피엔환잉은 일본군의 거점으로 끌려가 유린을 당했고 20일 뒤 친척의 도움하에 집으로 돌아왔다. 몇개월 뒤, 일본군에 재차 끌려간 그는 친척의 도움으로 “악마의 소굴”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 뒤, 끌려갔다 돌아오고를 반복한 피엔환잉은 4차 납치와 더불어 능욕도 견뎌야 했다.[촬영/잔옌(詹彥)]
구들위에 앉아 휴식하고 있는 하오쥐샹 노인(3월 9일 촬영). 94세의 하오쥐샹 노인은 산시성 우샹현 구청진 취엔덴촌에 거주하고 있다. 1939년 4월의 어느 하루, 집에 있던 17살난 하오쥐샹은 일본군에 끌려가 위안부로 강제 징용되었다. 일본군에 근 1개월간 능욕당한 뒤, 집에서 모은 은화를 주고 겨우 풀려나 돌아올 수 있었다.[촬영/잔옌(詹彥)]
집에 앉아 휴식하고 있는 피엔환잉 노인(3월 8일 촬영). 올해 88세인 피엔환잉 노인은 산시성 친(沁)현 놘쵄(暖泉)촌 사람이다. 1942년 가을, 14살에 불과했던 피엔환잉은 일본군의 거점으로 끌려가 유린을 당했고 20일 뒤 친척의 도움하에 집으로 돌아왔다. 몇개월 뒤, 일본군에 재차 끌려간 그는 친척의 도움으로 “악마의 소굴”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뒤, 끌려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한 피엔환잉은 4차례의 납치와 더불어 능욕도 견뎌야 했다.[촬영/잔옌(詹彥)]
집앞의 류가이롄 노인(3월 4일 촬영). 올해 95세의 류가이롄 노인은 산시(山西)성 양취(陽曲)현 황자이(黃寨)진에 거주하고 있다. 1943년 12월, 22세였던 류가이렌은 소탕된 일본군의 거점으로 잡혀가 유린을 당했고 그 후 집에서 은화를 치르고서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촬영/잔옌(詹彥)]
침대 위에 앉아 휴식하고 있는 자오란잉(趙蘭英) 노인(3월 9일 촬영). 올해 93세의 자오란잉 노인은 산시 우샹현 구청진 신이(信義)촌에 거주하고 있다. 1941년 6월, 18세의 자오란잉과 언니 자오란화(趙蘭花), 자오위잉(趙玉英)은 일본군에 의해 함께 끌려갔고 2개월 뒤, 가족들에 의해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약을 3개월간 복용한 뒤에서야 천천히 회복되었다.[촬영/잔옌(詹彥)]
집에 앉아 휴식하고 있는 하오웨롄(郝月蓮) 노인(3월 7일 촬영). 올해 88세의 하오웨롄 노인은 산시성 우샹현 구청진 양궁링(羊公嶺)촌에 거주하고 있다. 1943년 6월, 당시 15세에 불과했던 하오웨롄은 집에서 일본군에 붙들린 뒤 끈에 묶여진채 거점으로 끌려가 위안부로 강제 징용되었다. 1개월 뒤, 가족들이 모은 은화를 주고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2개월 뒤, 그는 일본군에 재차 끌려가 유린당했다. 20여일 뒤, 하오웨롄의 부친과 오빠가 일본군의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 하오웨롄을 집으로 업어왔다. 2번이나 위안부로 납치된 비참한 경력으로 그는 생육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촬영/잔옌(詹彥)]
산시성 친현, 리환칭(李煥清)이 언니인 리진위(李金魚) 노인의 사진을 들고있는 모습(3월 8일 촬영). 산시성 친현 장위안(漳源)진 난위안(南園)촌 사람인 리진위 노인은 1943년, 14살에 불과하던 나이에 중국 침략 일본군에 끌려가 위안부로 되었다. 2개월간의 비인간적인 학대로 그는 생육능력을 영원히 상실해 버렸다. 우호 인사들의 도움하에 일본 정부를 고소했던 리진위 노인은 2010년에 별세하기까지 일본 정부로부터 한마디 사과도 듣지 못했다.[촬영/잔옌(詹彥)]
촌민들이 장센투 노인의 관을 안치하고 있다(2015년 11월 20일 촬영).[촬영/잔옌(詹彥)]
차오헤이마오(曹黑毛)(왼쪽)와 “위안부” 피해자를 장기적으로 연구해온 민간 지원자 장쐉빙(張雙兵)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3월 4일 촬영).[촬영/잔옌(詹彥)]
“위안부” 피해자들을 장기적으로 연구해온 민간 지원자 장쐉빙이 중국 “위안부” 소송 사건에 대해 일본 법원이 내린 판결 자료를 들고 있는 모습(3월 2일 촬영). 산시성 양취엔(陽泉)시 위현의 시골교사인 그는 63년 인생에서 30년을 투자해 100여명의 위안부 피해자를 방문 및 조사했다. 1995년, 노인들을 이끈 장쐉빙은 변호사를 찾아 일본에서 소송을 진행했다. 그러나 세기를 넘나든 이 소송은 일본 지방 정부에서 시작해 일본 최고 법원으로 올라가기까지 10년을 기다렸으나 결국 패소로 마감되었다. 일본 정부가 사과와 더불어 배상을 보일 때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하든 끝까지 걸어갈 것이라고 장쐉빙은 말했다.[촬영/잔옌(詹彥)]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차오헤이마오 노인(3월 4일 촬영).[촬영/잔옌(詹彥)]
창밖을 보고있는 피엔환잉 노인(3월 8일 촬영).[촬영/잔옌(詹彥)]
집앞의 류가이롄 노인(3월 4일 촬영).[촬영/잔옌(詹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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