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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 승리 80주년) 중앙홍군은 어떻게 순리롭게 적의 세개 봉쇄선을 돌파할 수 있었는가

출처: 신화망 | 2016-08-10 09:59:20 | 편집: 이매

 

이는 광둥 군벌, 국민당 난창(南昌) 싱잉난루군(行营南路军) 총사령  천지탕(陈济棠) (자료 사진)

   [신화망 베이징 8월 10일] (자이칭화(翟清华) 러우스지아(娄思佳) 양루(杨茹) 기자)1934년 10월, 중앙 소비에트 지역은 50만 국민당 군의 제5차 “포위토벌”에 직면한 극히 위험한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장제스(蒋介石)가 총공격 발동을 준비한 전야 중공중앙기구와 홍군의 5개 주력부대가 포위망을 뚫고 장제스가 정성 들여 배치한 세개의 봉쇄선을 돌파하고 나와 서쪽으로 장정의 길에 올랐다. 

   이 세개 봉쇄선은 국민당군이 오랜 시간을 들여 조직한 것으로서 철옹성처럼 튼튼하지는 못해도 전쟁에서 한동안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홍군은 어떻게 순리롭게 돌파할 수 있었을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실력이다. 홍군의 강한 전투력이 보장되지 못하면 하나의 봉쇄선도 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홀시할 수 없는 인소는 중앙홍군이 돌파 전야에 천지탕(陈济棠) 광둥(广东) 군벌, 국민당 난창 사령부(南昌行营) 남쪽 육군 총사령관과 항일반장(反蒋)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사흘동안의 간고한 담판과 반복적인 교섭을 거쳐 결국 다섯가지 협의를 달성했다. 첫째: 그 자리에서 전쟁을 멈춘다. 둘째: 봉쇄를 제거한다. 셋째: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넷째: 홍군은 웨베이(粤北 광둥성 북부지역)에 후방 병원을 건설할 수 있다. 다섯째: 서로 관할 지역을 통과할 수 있고 쌍방이 현재 전선에서 20리씩 퇴각한다. 

이는 국민당군 두번째 봉쇄선위의 광둥 성구이다. (자료 사진)

   홍군에게 이 협정은 때 맞춰 내린 단비였고 가장 중요한 것은 “관할 지역 통과”에 대한 승낙이였다. 홍군의 전략적 전이는 거의 광둥의 중심 지역을 거치지 않았고 천지탕의 핵심은 “홍군이 광둥에 진입하지 않았”기에 뒷이은 묵계가 있었다. 

   1934년 10월21일, 홍군은 간저우성(贛城) 왕무두(王母渡), 신펑 신톈(信豐新田)에서 서쪽으로 출발해 국민당이 설치한 첫번째 봉쇄선을 돌파하기 시작했고 다음날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전보에서 광둥군 제1군단 군단장 “위한(余漢)의 모 부대가 이미 전부 퇴각”했다는 상황이 통보됐다. 일부 지역에서 자잘한 전투가 있었지만 강도가 크지 않았다. 

   첫번째 봉쇄선을 통과한 후 10월26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 “아군과 광둥군이 서진 도로를 내여줄 데 대한 담판, 광둥군이 자발적 퇴각 시 아군은 추격 금지에 대한 지시”을 발행했고 동시에 “이는 단지 자발적 퇴각 시에만 해당되지 절대 이로써 경각성과 전투준비를 늦춰서는 않된다”라고 지적했다. 

   장제스가 설치한 두번째 봉쇄선은 후난과 광둥의 인접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전보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봉쇄선 북쪽의 루청(汝城)은 후난성 경내에 있어 전진할 가능성이 없다. 남쪽의 성문은 이미 광둥성 경내에 속해있기에 이 도로는 초보적 보장을 받는다. 이런 유리한 조건하에 11월5일부터 8일까지 홍군은 또 비교적 순리롭게 두번째 봉쇄선을 돌파했다. 

이는 국민당군 세번째 봉쇄선 - 후난(湖南) 이장(宜章) 나루터이다. (자료 사진)

   국민당 군대가 설치한 세번째 봉쇄선은 후난 남부 천저우(湘南郴州)와 이장(宜章) 사이에 위치했다. 홍군은 “가마식”으로 행군하며 민첩하고 기동적이지 못했지만 국민당 군대의 대규모적 포위 추격에 앞길이 차단되지 않아 장제스가 군대를 이동시켜 진로 차단하기 보다 좀 더 빨랐다. 11일부터 15일까지 홍군은 기세를 몰아 국민당의 세번째 봉쇄선을 돌파해 후난 남부 지역에 들어섰다.  

   사실 홍군이 국민당의 봉쇄선을 돌파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도 실력이다. 광둥군과 홍군은 오랜 적수였다. 그들은 홍군과의 전쟁 중 패전이 승전보다 많았고 홍군의 용왕매진한 전투 정신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장정 중 곳곳에 위험이 닥치고 걸음마다 생사를 넘나들었지만 홍군은 전이 중에서 이 협정을 믿고 경각성을 잃지 않았다. 봉쇄선을 돌파할 때마다 홍군 특히 선봉을 맡은 홍군들은 항상 진지를 확고히 정비하고 전투태세로 전진하면서 그 어떤 산만함도 없었다. 

원문 출처:신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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