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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씨 일가 3대의 농민 ‘행복관’ 변천사

출처: 신화망 | 2018-12-18 09:24:34 | 편집: 이매

[신화망 스자좡 12월 18일] (차오궈창(曹國廠), 가오보(高博) 기자)  “땅은 우리 농민의 목숨줄이다. 사람이 땅을 속이지 않으면 땅은 사람에게 보답한다. 흙층 아래 30cm에 세균비료를 밑거름으로 넣었다. 내년에도 풍년이 들 것이다.” 53세의 자오궈창(趙國強)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아이 마냥 눈앞의 과일나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자오궈창의 아버지 자오솽시(趙雙喜)가 전동 삼륜차를 타고 왔다. 그는 과일나무 한 그루와 자신의 아들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수년 전 그는 아들이 땅에서 ‘금’을 캐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더욱이 대학을 졸업한 손녀 자우숴잉(趙爍穎)이 조상의 사업을 이어 받아 신식 직업 농민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오궈창은 허베이성 난허현 허양진 시네이촌의 전통 농가에서 자랐다. 그가 기억을 할 무렵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땅에서 일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지런하게 일해도 가족의 생활은 늘 빠듯했다.

어떻게 하면 땅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을 지가 자오家 가장의 최대 고민거리였다.

1978년 허베이 남부 작은 현에도 개혁개방의 훈풍이 불었다.

1980년대 초 마을은 농가 생산 청부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자오씨네는 18무(畝)의 땅을 받았다. 땅은 많아졌지만 땅을 갈고 파종하는 것이 골치거리로 대두했다.

“트랙터를 사자!” 자오솽시의 이 결정은 집에 폭탄을 던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데 무엇으로 트랙터를 사요?” 부인 쑨바오펀(孫寶芬)이 가장 먼저 반대를 하고 나섰다. 자오솽시는 물러서지 않고 순차적으로 일을 진행했다. 그는 “당시 염치 불구하고 이웃 14집에서 2700위안을 빌렸다”고 말했다. 마을의 첫 트랙터를 샀다.

다홍색의 트랙터를 본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트랙터가 있으니 자오가네는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것 같았다. 자오솽시는 당시에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2006년8월 자오궈창은 위 종양으로 수술을 했다. 베이징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는 건강식품, 유기농 식품 등을 처음 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는 자신의 땅과 이웃집의 땅 50무를 빌려 유기농 야채를 심었다. 그는 매일 땅을 돌아다니며 살펴본다면서 “하루라도 땅에 가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2년 봄, 싱타이시위원회 통일전선공작부는 타이완 현대농업 시찰단을 꾸렸다. 자오궈창도 운 좋게 시찰단 일원으로 뽑혔다. 타이완에서 돌아온 그는 현대농업과 관련된 농업 정책을 공부하기 시작해 가족농장을 개장하는 것에 착수했다.

자오궈창은 적극적으로 열심히 하기만 하면 돌 틈에서도 싹이 자라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2012년 말 그는 마을 땅 200무의 토지사용권을 양도받아 만든 난허현의 첫 가족농장에 과일나무와 유기농 야채를 심고 닭, 오리, 돼지를 기르기 시작했다.

자오궈창은 지금은 건강을 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작년 9월에 800무의 땅을 양도받았다. 연간 소득 100만 위안 올리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마을에서 유명 인사, 능력자로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비결을 배우러 오고 있다.

일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 자오궈창은 “개혁개방 후의 정책을 통해 촌사람인 나는 땅에서 ‘금’을 캤다”고 말했다.

원문 출처: 신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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