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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승리70주년 특집-아버지 기억속의 "외국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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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제방송 | 2015-07-08 10:33:58  | 편집 :  필추란

   1945년, 구호총대 일부 의료대원 귀양 도운관에서 합영

   "이 이야기들이 전해질수 있다면 얼마가 좋을가요?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연로해졌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미 70-80세 고령입니다. 제2세대가 사망하면 더 이상 이 역사가 후세에 전해지기 어렵습니다."

   올해 65세인 양영훤(楊永楦)의 목소리이다. 1945년,그의 아버지 양석수(楊錫壽)는 전장 의사로 중국 적십자회 구호총대에 가입했다. 귀양 도운관(貴陽圖雲關)에서 양석수는 폴란드와 독일,오스트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등 나라의 중국 지원 국제의료팀과 함께 항일전쟁중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와 현지 대중들을 위한 병치료와 인명구조 작업을 펼치면서 생명과 신념으로 인도주의 화폭을 그렸다.

   "우리 발아래 이 땅이 바로 도운관입니다. 76년전, 규모가 방대한 부대가 이곳에 왔지요. 그들이 이곳이 숙영하면서 임시 초가집들이 이곳저곳에 들어 앉았습니다. 부대에는 의사가 3000명 좌우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화교와 국내 유명병원의 의사, 먼 유럽에서 온 외국적 의사들도 있었습니다."

   양영훤의 아버지 양석수는 강서 중정의학원(江西中正醫學院)을 졸업했다. 29세에 도운관에 온 양석수는 전장의사가 되기 위해 외국 주치의들 앞에서 자신의 의학수준을 증명해야 했는데 시험과제는 마비환자의 병례를 분석하는것이였다.

   "아버지는 초가집에서 시험을 보게 됐습니다. 사면이 바람이 통하고 불도 쪼일수 없는 곳이였지요. 침대가 하나 있었고 책상도 없었습니다.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침대를 책상삼아,나무 상자를 걸상 삼아 침대위에서 마비환자의 병례를 분석했습니다. 3일후, 아버지는 환자가 누워있는 병상앞에서 여러나라 전문가들에게 순 영어로 병례분석을 진행했습니다. 아버지의 진술이 끝난후 외국의사들은 "아주 훌륭합니다."라는 한마디를 했다고 합니다. 그 후 아버지는 도운관에 남게 됐지요."

   양석수의 회억에 따르면 도운관에는 중국 지원 국제의료팀과 중국의사 외 적지 않은 중의 전문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땀을 흘리고 마사지를 하며 얼음찜질을 하고 침구를 하는 등 전통 중의 요법으로 병을 치료했다. 의료설비를 통해 화험결과로 확진하고 약물이나 수술로 치료하는 외국의사들의 눈에 중의 특유의 치료방법은 낯설고도 신기했다.

   "어떤 중국 의사들이 침구로 병치료하는것을 보고 외국의사들은 아주 신기해 했다고 합니다.서의를 전공한 아버지는 중의에서 말하는 금기사항들을 믿지 않았지만 침구에 대해서는 신임했지요. 침구는 신경을 자극하는것이니까요. 그때 많은 외국인과 아버지는 침구의 효능에 놀랐다고 합니다."

   1945년, 항일전쟁 승리에 즈음해 적십자회 구호총대와 중국 지원 국제의료팀 성원들의 업무는 상대적으로 줄었다. 비록 부상자가 여전히 끊기지 않았지만 생활,근무 환경이 크게 개선되여 퇴근후 국내외 의사들은 자체의 휴식,오락시간을 갖게 되였다.

   "여가시간에 그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아버지도 많은 영어 노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촛불연회도 열고 산밑에 내려가 귀양의 특색먹거리를 맛보기도 했지요. 아주 매웠지만 모두 맛있다고 혀를 찼답니다. 이들은 또 서로 선물을 주고 받기도 했지요. 외국의사가 어머니에게 꿀벌표 긴 양말을 선물했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풀어 저의 털실옷을 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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