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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은 영원히 하나- 남중국해 중재안의 중국-필리핀 간 역사 증거 사용에 관하여

출처 :  신화망 | 2016-05-26 11:09:27  | 편집 :  박금화

(자료 사진)

   [신화망 베이징 5월 26일] 2013년 1월, 필리핀은 “유엔해양법협약” 제7부속서에 따른 강제적 중재를 일방적으로 제기했는데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향유하는 역사적 권리를 부정해달라는 것이 소송청구로 된다.

   역사적 권리란 남중국해 여러 섬과 관련 해역에서 중국이 장기적인 역사 실천속에 항행, 어획, 행정관제 등에 관련하여 확립하고 형성한 권리로 확고한 역사 사실에 근거할 뿐더러 확고하면서도 검증 가능한 역사 증거를 가진다.

   그러나 필리핀 측은 소송목적을 이루기 위해 후안무치한 망발을 날조하면서 설득력이 없는, 헛소리에 불과한 일련의 역사 증거를 공들여 꾸며냈다. 자세히 분석해보면 꼼수는 아래와 같은 특점을 가진다.

   첫째가 스스로 모순되는 점이다. 영토 주권은 “협약”에 적용되거나 이로 해석될 문제가 아니므로 필리핀 측이 중재소송을 공들여 포장하는데는 중재청구와 섬의 주권과는 무관한 가상을 꾸며내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그러나 증거 조작에서 필리핀 측은 착오적인 관점과 악의적 꼼수를 가진채 중국이 남중국해 제도를 최초로 발견, 명명했고 장기적으로 개발, 이용했으며 지속적, 평화적, 효과적으로 관할권을 행사해온 완정한 증거사슬을 무시한채 걸핏하면 “중국의 영토범위에서 최남단 경계는 하이난도(海南島)에 미치지 못한다”, “1933년에서야 남중국해 섬에 대한 주권 요구를 제기했다”, “중국은 남중국해 제도에 대해 관할을 행사한적 없다”며 강조해왔다.

   둘째는 단장취의(斷章取義, 문장을 끊어 뜻을 취하다)이라는 점이다. 필리핀 측은 문자 증거 사용에서 "1937년의 중국정부 문건에서 난사군도가 중국 영토의 최남단이라 확인했다"고 제기하는 등 수차례 문장 전체의 의지를 은폐한 채 당국 입장을 지지하는 일부분만 취해왔다. 필리핀 측이 취한 1937년의 이 국방위원회 비서실 문건에서 관련 단락은 사실 "오늘의 지리학자가 중국 국경 최남단이 시사군도의 트리톤섬(중국명 중지엔도(中建島))이라 말하지만 본국 남부 발전역사를 고려했을 때 이 해역 남부 9개 섬은 모두 본국령이다..."라고 게재되어 있다. 사실 현존하는 역사문헌을 보면 송나라때부터 전해진 지방지(地方誌), 명나라때부터 전해진 지도에서는 "스탕(石塘)", "창사"를 중국 강역 범위로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민국시기, 중국정부는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중국 남중국해 제도 지명을 특별 심의했으며 "중국남중국해도서도(中國南海各島嶼圖)"를 편집 및 인쇄하여 남중국해 제도가 중국 판도에 귀속된다고 명확히 표기했다.

   셋째는 일부러 숨겼다는 점이다. 중국에 유리한 대량의 역사 증거를 두고 필리핀 측은 예를 들어 1947년 전에 중국은 남중국해 제도에 관해 명명하지 않았다거나, 중국은 남중국해 항행에서 난사군도 부근 위험구역을 고의적으로 개척했다는 등 선택성있게 "실명"했다. 그런 까닭에 필리핀 측은 명나라·청나라(明清)이래 난사 수역 중국 어민들이 어획작업으로 살아왔고 난사군도 주인으로 되었다는 역사 사실을 애써 숨겼다. 그러나 상술한 사실은 여러 판본으로 된 "경로부(更路簿)"로 증명이 가능하다. "경로부"는 "남중국해 위험구역"을 향한 항행 지침중 난사 섬 어획작업의 항로에 대해 정확히 서술하면서 시사(西沙) 전통 지명으로 30여개, 난사 전통 지명으로 70여개를 언급했는데 Nam Yit (어민명 난이(南乙), 훙슈도(鴻庥島)), Subi(어민명 처우웨이(醜未), 주비쟈오(諸碧礁)), Sin Cowe (어민명 청거우(秤鉤), 징훙도(景宏島)) 등 일부 지명은 서방에 의해 취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19세기이래 외국문헌에도 섬에서 중국어민들이 생산 및 생활해온 역사 사실이 기록돼 있는데 1868년 영국해군의 "중국해 지침", 1923년 미국해군해도측량서의 "아시아 파일럿", 1940년 일본 전 해군 고쿠라 우노스케의 "폭풍의 섬" 등이 그 예로 된다.

   넷째는 일부로 전체를 평가했다는 점이다. 필리핀 측은 기타 나라에는 중국이 남중국해 제도에 대해 주권을 가진다는 것을 해석할 만한 지도가 없다고 제기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후 기타 나라 대량의 지도, 백과전서, 신문잡지 등에서 남중국해 제도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인정했는데 중국 난사 섬을 침점한 과거가 있는 프랑스와 일본도 그중 일부이다. 1952년 오카자키 외무상이 친필 추천한 "표준세계지도집"과 1956년 프랑스가 출판한 "라루스세계정치경제지도집" 등에는 난사군도가 중국령이라고 명확히 표기되어 있다. 심지어 베트남 지도 역시 그중 하나로 1960년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지도처에서 편집 및 제작한 "세계지도", 1972년 베트남 총리부에서 측량하고 제도국에서 인쇄 및 제작한 "세계지도집"이 그 예로 된다.

   다섯째는 이화접목(移花接木, 현실성이 결여된 얕은 꾀로 남을 속이는 계략)이라는 점이다. 필리핀 측은 중국과의 역사를 쟁탈하기 위해 베트남의 황사(파라셀 제도), 창사를 중국의 시사(西沙), 난사(南沙)로 혼란시키고 필리핀 근해 해변의 Panacot를 중국 황옌다오(黃巖島)로 뒤섞는 관점을 고심으로 취해 베트남은 시사에서 최초로 행정 관할을 실시했고 시사, 난사를 판도에 최초로 표시했으며 황옌다오는 18세기 상엽에 이미 필리핀 지도에 표시됐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된 수단이나 과정에 대해 한전화(韓振華), 리진밍(李金明), 리샤오충(李孝聰) 등 중국학자들의 검증이나 반박은 이미 이뤄진바 있다.

   여섯째로 "하나의 중국"을 분리했다는 점이다. 필리핀 측은 실체 법정 신문 단계에서 "1949년부터 오직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만이 중국을 대표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는 1949년 전까지 중국에 귀속된 것이며 본질적으로 타이완 당국의 행위는 1949년 후부터는 중국에 더이상 귀속되지 않았다"고 망언했다. 필리핀 측은 양국 수교 성명중 "중국은 오직 하나이며 타이완은 중국 영토에서 불가분리의 일부분이라는 것에 대한 중국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라고 된 엄숙한 약속을 공공연히 위반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후에도 중국 타이완 방면 행위가 중국에 속한다는 내용을 말살했으며 실질적으로는 "중국과 타이완은 별개"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은 1988년에야 난사에서 실제 존재를 구축했다"는 등 관점을 제기했다. 1950년에 난사 타이핑다오(太平島)에서 임시 철수했던 타이완 방면은 1956년에 필리핀 측이 중국 난사군도 부분 섬을 침점하기 위한 의도로 "크루마"사건을 도발하자 즉각 복귀하여 지금까지 장기적으로 주둔해왔을 뿐더러 난사해역에서 정기적인 순찰과 민사적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일곱째로 개별 연구로 객관사실을 대체했다는 점이다. 기원 11세기 전 및 식민지시대에 남중국해의 개발, 관할에 대해 동남아국가, 서방 식민지국가가 발휘한 역할을 논증할 때 유력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자 필리핀은 객관사실을 무시한채 일부 학자의 관점만 선택적으로 취하면서 이 국가들의 역할을 부풀렸다. 그러나 이는 남중국해를 오갔던 각국 항해가들이 남긴 성실한 기록과 남중국해 바다 밑에 잠긴 역대 중국 침몰선들의 흔적을 지울 수 없다.

   남중국해 역사에 중국정부 및 인민들이 깊이 남긴 흔적을 덮어감추고 세인을 속이려는 의도로 필리핀 측이 거짓말에 그 아무리 화려한 탈을 씌우든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역사 사실에 근거하여 소유하는 주권과 관련 권익은 말살할 수 없는 것이다. 진상은 영원히 하나뿐이며 정의는 영원히 존재한다.

원문 출처:인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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