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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무릅쓴 정의로운 릴레이——세 명의 영국 우호 인사 중국인 도와 일본 침략 증거를 폭로한 이야기

출처 :  신화망 | 2016-09-21 16:23:39  | 편집 :  박금화

   [신화망 선양(沈陽) 9월 21일] (쉬양(徐揚), 조훙난(趙洪南) 기자) “9.18 사변” 발발 85주년을 앞두고, 깊이 묻혔던 한 지난날의 이야기가 랴오닝(遼寧) 역사학계에 의해 발굴되었다. 세 명의 영국 우호 인사는 사변 발생 후,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의 애국 인사들을 대신해 국제 조사단에 일본의 중국 침략 증거를 릴레이로 전달했다. 이 “TRUTH”(진실) 이라는 중국 침략 죄증은, 현재까지 여전히 유엔 제네바 도서관 내에 소장되어 있다. 이 세 사람의 정의로운 행동과 두려움 없는 용감성에 대해, 학자들은 “선양 라베”로 부르고 있다.

   세 명의 영국 우호 인사 중국인들을 위해 릴레이 “진상” 폭로

   “선양 라베”의 발견은 한 《TRUTH》라는 사료의 제목에서 시작되었다. “9.18 사변” 발발 이후, 일본은 반년도 채 안돼 동북 전역을 독점했다. 국민 정부의 요청에 의해, 국제 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해 현지 조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국제 사회에 일본의 침략 죄행을 폭로하기 위해 선양 “9 군자”라는 9명의 애국 인사들은 함께 모였다. 그들 중에는 공산당원, 의사, 교수, 은행가들이 있었는데, 비록 신분은 서로 달랐지만, 이들이 공동한 신념이 있었다. 즉, 일본 제국주의의 죄악 행위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 중국 침략 직접 증거를 수집함과 동시에, 이를 모아 책으로 편집했는데 《TRUTH》(진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일본군의 엄밀한 봉쇄와 통제 속에서 조사단에 접근하려면 하늘의 별따기었다. 9명의 애국 인사 중 의사인 리우중밍(劉仲明)은 고심 끝에, 자신이 알고 있던 영국인 윌리엄(William R Young)을 떠올렸다. 윌리엄은 당시 성징스(盛京施)병원 윈장이었고, 동시에 펑톈(奉天)의학 전문 학교의 법의학 교수를 맡고 있었다.

   리우중밍이 윌리엄에게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윌리엄은 당연히 이 의거의 엄청난 위험성을 알았다.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주동적으로 리우중밍 등에게 계책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북 아일랜드인 프리드리히(Frederick WS O’neil) 박사를 추천하면서 구체적으로 실행하기로 했다.

   프리드리히는 국제 연맹 조사단 리튼 단장과는 구면이었다. 윌리엄의 기획에 따라 프리드리히는 특별히 선양에 가서 《TRUTH》를 가져왔다. 서류를 받았을 때 프리드리히는 그 속에 담긴 분량을 체감하면서 “가령 내가 죽는다면, 나는 하나의 위대한 사업을 위해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류는 매우 컸고 매우 중요했던 만큼 프리드리히는 그것을 선양 주재 영국 총영사관 금고 안에 놓고 보관했다. 국제 연맹 조사단이 선양에 도착한 후 프리드리히는 또 리튼 단장에게 친필 편지를 쓰는 동시에, 친척 신분으로 찾아가 방문했다. 후에 또 다른 영국인 노튼(William McNaughtan) 집에서 주연을 교묘하게 베풀어 일본인들의 소식 탐문을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이번 만남에서 세 명의 영국 우호 인사는 연대 서명으로 “9 군자” 행동 및 《TRUTH》의 진실성을 보증해줬다. 다음날 리튼은 영사관에서 이 《TRUTH》를 받았다.

   “국제 반파시즘투쟁 역사상의 중요 증인”

   중국 근현대사사료학회(中國近現代史史料學會) 왕지엔쉐(王建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 명 영국 우호 인사의 주선과 죽음을 무릅쓴 협조로 인해, 선양 “9 군자”는 끝내 국제 법정 중재 절차에 따라 성공적으로 《TRUTH》를 제출하게 되었다. 하여 《국제 연맹 조사단 보고서》의 초안 및 국제 연맹 중재에 대량의 실증을 제공함으로써, 국제 사회가 “9.18 사변” 및 만주국에 대해 비교적 공정한 규정을 내릴 수 있었다. 중국은 이로부터 정치, 외교 및 도의적으로 국제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33년 2월, 국제 연맹 특별 대회에서는 42표 찬성, 일본 1표 반대로 《국제 연맹 조사단 보고서》에 따라 형성된 결의를 통과했다. 이는 국제 사회가 처음으로 “9.18 사변” 진상을 선포한 중요한 문헌이다. 일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윌리엄, 프리드리히, 노튼 세명의 영국 우호 인사는, “9 군자”를 위해 바늘에 실을 꿰듯 일본의 침략 죄증을 이어가면서 전달했다. 이는 중 • 영 양국 인민들이 공동으로 침략을 저지하고 정의와 평화를 수호한 역사적 증거이며 국제 반파쇼 투쟁사의 중요한 증인이다.

   80여년간 묻혔던 한 단락 미담, 다시 세상에

   80여년이 지났다. 학자들은 어떻게 오래토록 묻혔던 이 한 단락의 역사를 복원할 것인가?

   “이는 아마 인연일지도 무른다.” 장지에(張潔)는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서류 전달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프리드리히, 그의 후대들도 선열의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이 숨겨진 역사를 탐방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프리드리히는 어쩔 수 없이 중국을 떠나게 되었다. 수십년이 지난 뒤 그의 손자 마크 • 오닐은 중국에 와서 일하고 있고 중국 안해를 얻었다. 중국에서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그는 이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또 《관둥(關東)으로 온 아이랜드인》이란 책을 써서 할아버지를 기념했다. 장지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로 이 책을 통해 그녀는 마크를 찾게 되었고 이 단락의 역사도 비로소 80여년 간 묻혔다가 다시 완벽하게 환원되었다.

   현재 왕잰시예, 장지예 등 학자 등 학자들은 마크 • 오닐과 이미 손을 잡고 있는 데, 《TRUTH》 관련 최신 연구 성과도 마크에 의해 아이랜드와 영국에 소개되고 있다.

   마크는 여러 차례 장지예 등 학자들에게 밝혔다. 중국 학자들의 이 단락의 역사에 대한 진일보한 발굴 및 연구로 인해 이 역사가 국제 사회에 더 많이 이해되고 명기됨으로써 평화와 정의의 힘이 더욱 잘 전파되기를 희망한다.

원문 출처:신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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