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32’ 화면 캡처 사진
[신화망 베이징 7월 20일] 2012년 12월, 80년대생 궈커(郭柯) 감독은 ‘위안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한 편을 촬영했다. 당시 전국에 32명의 위안부 생존자만 남아 있었기에 다큐 제목을 ‘32’로 지었다. 2014년 그는 새로운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다큐 중의 숫자는 ‘32’에서 ‘22’로 바뀌었다. 2017년 1월까지 이들 노인 중 11명만 생존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7세의 웨이샤오란(韋紹蘭) 노인은 1/32의 일원이자 1/11의 일원이다. 그녀는 1944년 일본군에 끌려가 마링(馬嶺) 위안소로 보내졌다. 3개월 후의 어느 날 그녀는 보초를 서던 일본 사병이 조는 틈을 타 위안소를 도망쳤지만 악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일본인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발견했다. 당시 그녀는 죽으려고 농약을 먹었는데 이웃 주민에게 발견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훗날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왜 죽냐, 생명인데 살려야지”라고 충고했다. 아들이 태어난 후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뤄산쉐(羅善學)로 지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뤄산쉐는 아직 미혼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길을 받으면서 자랐다.
린아이란(林愛蘭) 노인은 당시 아시아 전체에서 유일하게 강요 당해 ‘위안부’가 된 항일여전사 생존자이다. 14세 되던 해 린아이란은 공산당이 이끄는 츙야(瓊崖) 종대에 참가해 혁명 낭자군 중의 일원이 되었다. 그녀는 일본부대에 가 중국군에게 탄두를 훔쳐다 준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두 개의 기념 휘장을 받았다. 그녀는 생전에 이 두 개의 기념 휘장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린아이란 할머니도 일생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70세 무렵에 한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2015년말, 린아이란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지방 풍속으로 인해 아들이나 남자 친척만이 돌아가신 분을 위해 비석을 세울 수 있었기에 딸은 어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인의 당시의 무덤은 황토 밖에 없었다.
웨이샤오란 노인과 린아이란 노인은 창문처럼 우리가 ‘위안부’ 노인의 생활 상태나 그들의 배후에 있는 진실한 역사를 알게 했다. ‘위안부’ 이력은 평생 고통을 남긴다. 생존한 피해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어떤 할머니는 한 때 지울 수 없는 고통스런 기억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고, 이미 돌아가신 어떤 ‘위안부’ 할머니는 생전에 잠잘 때 침대 곁에 칼을 두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일생을 상처받고, 평생을 증오했다. 갈라진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수십 년간 아물지 않는 마음은 상처를 준 사람들이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하길 기다리고 있다. 손을 불끈 쥐고 탄식하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중국 ‘위안부’들이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오고도 아직까지 일본 정부의 어떠한 사과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설령 마지막 한 사람만 남는다 하더라도 일본이 사과하는 그 날을 보고야 말겠다.” 이는 많은 ‘위안부’ 노인들의 굳건한 신념이다. 생존한 ‘산증인’들도 머지 않아 모두 세상을 떠날 수도 있으므로 일본 정부는 그렇게 되면 마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죄악의 과거는 시간의 흐름에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고, 역사의 상처는 영원히 보기만 해도 몸서리를 치게 만들 것이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에게 사과할 시간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원문 출처: 신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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