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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이웃나라와의 화해를 이루어낼 수 없다

출처 :  신화망 한국어판 | 2015-04-29 16:39:20  | 편집 :  전명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이웃나라와의 화해를 이루어낼 수 없다—산둥대학 한국학원 원장과의 특별 인터뷰

산둥대학 한국학원 뉴린제 원장(자료 사진)

   [신화사 베이징 4월 29일] 2015년은 중국 인민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인 동시에 세계 반파시즘 전쟁이 승리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오랫동안 지속된 이 전쟁에서 자욱한 포연에 휩싸여 민중이 도탄속에서 허덕인 것은 비단 중화대지뿐이 아니며 중국과 이웃한 조선반도 인민들 역시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참혹한 희생을 치뤘다. 이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고 동북아 대중의 항일전쟁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신화망은 중국의 저명한 한국 문제 전문가인 뉴린제(牛林傑) 산둥(山东)대학 한국학원 원장을 찾아 조선반도의 항일전쟁이 중국 나아가 아시아의 반파시즘 전장에서 차지하는 지위 및 발휘한 역할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화망: 조선반도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 당시 조선반도의 인민들은 식민자와의 투쟁을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 당시 어떻게 항일 투쟁을 전개했는가? 이 투쟁과정에 이들은 어떤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는가?

   뉴린제: 압박이 있는 곳이면 반항이 있기 마련이다. 조선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 조선반도 내 애국 지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기세드높은 항일투쟁을 벌렸다.

   1909년 10월 26일, 조선의 애국 지사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哈爾濱) 기차역에서 당시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1919년 3월 1일, 조선반도에는 한차례 대규모 항일 민족 독립운동이 발발했고 역사에서는 이를 “3.1운동”이라고 부른다. 1919년 9월, 조선반도의 애국지사들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립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조선반도 인민들을 조직, 인솔해 항일 투쟁을 벌렸다. 1932년 4월 29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일본 육군 고급 장교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큰 사건들은 조선반도 인민 항일투쟁 활동의 하나의 축도이다.

   일본은 조선반도에서 항일 독립운동에 대해 잔혹한 진압 정책을 실시했으며 조선반도 항일투쟁의 주요 전장이 점차 중국으로 이전됐다. 조선반도의 항일 무장은 중국 측의 대폭적인 지지 속에서 선후로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을 성립했다. 한편 동북 지역에서 항일 활동을 펼친 “한국독립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으로 중한 항일연군을 구성해 항일유격전을 펼쳤다.

   기나긴 항일투쟁 여정에서 조선반도 인민은 중대한 민족의 희생을 치뤘다. 일본은 조선반도의 항일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반도 각지에 대량의 감옥을 설치했고 수많은 애국 지사들이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돼 감옥에 수감되어 각종 고신에 견뎌야 했으며 이들중 적지않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국난에 순사했다. 일본군은 잔인무도하게 대량의 조선반도 여성을 위안부로 충당했고 이들의 심신에 엄중한 상처를 입혔다. 오늘날 까지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한일, 조일관계에 영향주는 민감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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