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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사 베이징 7월 6일] 1936년 6월, 미국 기자 에드가 스노우가 생명의 위헙을 무릅쓰고 중국공산당이 역사적인 쾌거 “만리장정”을 완성한 최후의 지향점—산베이(陝北)를 찾았다. 그는 마오저둥(毛澤東)과 토굴집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장제스(蔣介石) 눈에는 “산적”에 불과한 정당과 군대가 어떻게 중국인을 인솔해 한걸음 한걸음 민주와 자유를 쟁취하는 길로 나아갔는 지를 알게 됐고 이 동안의 역사로 《붉은 별이 중국을 비추네(紅星照耀中國)》를 펼쳐냈다.
통계에 따르면 당시 옌안(延安)을 찾은 학자, 예술가와 지식청년은 약 6만명에 달했다. 1937년부터 1938년 1년 사이에만 팔로군 주 시안(西安) 판사처에서는 2만여명에 달하는 청년을 접대하고 옌안으로 보냈다.
옌안에는 도대체 어떤 오묘함이 숨겨져 있을까? 유명 애국 화교 천자캉(陳嘉康)의 대조가 꽤 대표적이다. 1940년 천자캉은 귀국해 항전 상황을 고찰할 당시 선후로 충칭(重慶)과 옌안을 찾았고 중국의 이 두 정치와 군사 중심이 그에게 심각하지만 또 전혀 정반대되는 인상을 남겼다.
충칭에서 천자캉은 남자들이 긴 마고자를 입고 있는 등 청나라 제복이 여전히 존재하고 여자들은 빨란 입술연지에 치파오(旗袍), 하이힐과 빨간 네일을 하고 있었으며 행정관은 사설영업을 운영했고 검찰원은 책임감이 없는 모습을 보았다……
옌안에 머무는 짧디짧은 8일간 천자캉은 하나의 참신한 세상을 보았다. 하나는 평등이고 둘은 가렴잡세가 없는 것이였다. 지주는 “소작료와 세금을 낮춰줘야 했고” 농민들은 “소작료와 세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노동자, 농민 모두 합리하게 국가 과세를 부담하고 있었다. 셋은 민주정치를 실행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고찰을 종료하고 남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천자캉은 미얀마 양곤을 경과하게 됐고 현지 화교 환영회에서 그는 큰 소리로 “중국의 희망은 옌안에 있다!”고 외쳤다.
이곳은 홍군과 항일유격역량으로 개편된 팔로군, 신사군의 총 지휘부이기도 하다.
“국정부가 정면전장에서 견결히 저항해 일본 침략자들의 예상을 깨부쉈다. 그러나 침략자들이 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또 하나의 전장—공산당이 영도하는 적후전장이 나타난 것이다.” 진이난(金一南) 국방대학 교수는 이같이 말하면서 “이는 반파시즘전쟁 중국 전장에서 나타는 기이한 광경이다”라고 지적했다.
항전기간 공산당이 대중들을 발동, 조직하고 무장해 형성한 수많은 항일 근거지는 일본이 “전쟁으로 전쟁을 양육하려는” 목적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핑싱관(平型關) 대첩, 옌먼관(雁門關) 매복전, 양밍바오(陽明堡) 공항 야간 습격, 황투링(黃土嶺) 전투, 바이퇀(百團)대전 등 전역의 승리를 통해 근 60%에 달하는 일본 육군 군력의 발목을 잡았다.
적후 전장에서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무장은 대적작전 12.5만회를 조직했고 약100만제곱킬로미터, 근 1억 인구에 달하는 항일근거지를 건립해 명실상부한 항전의 “버팀목”이 되었다. [글/신화사 기자 리윈루(李雲路), 차이민(蔡敏), 쉬샤오칭(許曉青) 참여기자: 장천룽(姜辰蓉), 리화이옌(李懷巖), 번역/ 신화망 한국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