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사진)
[신화망 충칭 1월 8일] (장친(張琴) 류언리(劉恩黎)기자)최근, 중국 천부콜라그룹회사(天府可樂集團公司)는 민족브랜드 천부콜라가 시장으로 정식 복귀했다고 발표했다. 20세기 80년대에 휘황을 이루고 90년대 공동 출자후엔 사라졌다가 오늘날 재부활을 보이기까지, 내부인사들은 천부콜라의 “기사회생”이 민족브랜드에 경종과 같은 의미를 던져준다고 지적했다.
한장의 시간표로 민족브랜드 천부콜라가 “기사회생”을 이룬 배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좌절을 보여줄 수 있다. 1936년에 탄생된 민족기업이 항전기간에 충칭(重慶)으로 이주한다. 1980년에 천연중약성분으로 구성된 천부콜라 조제법이 고고성을 울렸다. 1988년, 천부콜라 산하 포장공장이 108개에 이르면서 국내 콜라시장에서 75%의 점유율을 기록한다. 1990년, 모스크바에 포장공장을 설립하고 일본 카자마주식회사가 주동적으로 대리를 맡았으며 미국 세계무역센터빌딩에 회사를 설립한뒤 천부콜라 특별 판매를 시작했다. 1994년, 국제음료수브랜드와 공동 출자를 개시했다. 천부콜라는 시장판매량이 점차 감소되었고 최대 손실은 누계 7000만위안을 기록했다. 2008년, 협력사를 향해 천부콜라 조제법 및 제작공예 소유권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2010년, 충칭시 제5중급인민법원 판결에서 천부콜라는 승소를 거뒀고 법원은 협력사가 조제법 및 공예를 되돌려줄 것을 제시했다. 2013년, 천부콜라 상표가 되돌려졌다. 2014년, 천부콜라 테스트생산이 시작되었다. 2016년, 천부콜라 브랜드가 정식 부활했다.
여든 고령의 전 천부콜라그룹회사 총지배인인 리페이(李培)는 시간표위에 적혀진 매 하나의 좌절을 직접 경험해온 인물로 천부콜라을 부활시키고저 그는 근년래 수없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정말 내키지 않았다. 그토록 휘황했던 브랜드, 연간 판매액이 7000만위안이고 이윤은 1000만위안에 이르렀던, 총자산이 근 1억이었던 중국 특색을 구비한 중약 ‘콜라’는 세계음료계 거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브랜드였지 않았는가. 그토록 많은 좌절을 겪고서 끝내는 재출시를 이루게 됐으니 너무 흥분된다. 말로는 형용될수 없는 심정이다”라고 노인은 피력했다.
1994년, 천부콜라와 펩시콜라는 협력 및 공동 출자를 통해 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관리경험 및 권익보호의식이 결핍했던 원인으로 회사는 여러해 계속 손실만 기록했다. 공동으로 출자한뒤, 펩시는 천부콜라 생산에서 50%를 담당하겠다던 약속을 불이행했고 해가 갈수록 천부콜라를 위한 생산량이 줄어들다가 2005년에는 급기야 1%만 남게 되었다. 협력사가 기록한 최대 손실은 누계 7000만위안에 이르렀고 중국기업의 이윤이란 무일푼이었다. 특별빈곤기업으로 된 천부콜라그룹은 2006년에 이르러 주식을 전부 팔아버렸고 펩시가 94.4%의 주식을 지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렇게 천부콜라는 시장속에서 점차 자취를 감춰갔다.
2010년 12월 4일, 충칭시 제5중급인민법원은 천부콜라의 조제법 및 생산공예 등 부분이 중국 천부콜라그룹회사의 소유로 되며 펩시콜라는 이 부분의 사용을 중단하고 조제법 및 생산공예 등 자료를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다. 천부콜라그룹이 펩시회사를 상대로 상업기밀 침해 및 민사배상 요구를 내용으로 한 청구소송을 낸 것에 관해 법원은 사실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각을 내렸지만 이번의 승소로 인해 천부콜라는 조제법 및 제작공예의 소유권을 최종적으로 되돌릴수 있게 되었다.
첸황(錢黃) 그룹회사 현임 총지배인은 “2016년은 천부콜라에 회생의 한해로 남는다. 물론 20년 가까이 파묻긴 역사가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돌아왔다. 천부콜라는 천연중약재로 된 조제법을 지켜가고 높은 품질에 보건효과가 있는 콜라를 계속 만들어갈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자오완이(趙萬壹) 서남정법대학(西南政法大學) 민상법학원(民商法学院) 원장은 이같은 협력이나 인수합병은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이기에 민족기업은 리스크의식을 높이고 과거의 경험교훈을 섭취하며 국제규칙을 부단히 학습 및 장악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래야만이 자신의 권익과 민족브랜드의 거대한 발전을 충분히 확보할수 있다고 역설했다.
원문출처: 신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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