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사진)
[신화망 베이징 5월 15일] (왕줘뤈(王卓倫) 기자) 일본 내각 공식 홈페이지와 외무성 홈페이지에서는 4월 15일 ‘사료(史料)’를 발표하여 댜오위다오(釣魚島)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이에 대해 류장융(劉江永) 칭화대학 국제관계연구원 교수는 최근 신화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세히 연구해보면 관련 사료는 반대로 댜오위다오가 일본에 속하지 않음을 증명해준다고 말했다.
류장융은 이 "사료"는 '센카쿠열도(즉 중국 댜오위다오 열도) 관련 자료 조사 보고서'로 일본 국내 30여개 도서관, 박물관, 자료실 문헌자료 등을 수집한 기초상에서 작성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알아본 데 의하면 수집 작업중 일본 국내에 현존한 300여개 댜오위다오 관련 자료들을 확인했지만 보고서에서는 그 중의 19개 사진 자료만 게재했다.
“이 보고서는 겉으로 보면 일본 정부와 같은 입장을 유지했지만 실제로 정부 당국의 입장과 일부 다른 류큐 학자의 관점을 드러냈다.” 류장융은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설명했다. 다카라 구라요시(高良倉吉) 보고서 기초위원회 수석위원 및 류큐대학 명예교수는 “류큐왕국 시대의 약 500년간, 류큐사람들은 류큐섬과 중국 대륙 사이의 바다(즉 동중국해)에서 활발하게 왕래했다. 아쉬운 점은 그들이 당시에 그 바다를 어떻게 칭하였는지는 현존한 기록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근대 이전에 ‘센카쿠열도’는 류큐 것도 아니고 류큐 이외의 어떠한 사람 것도 아니다...그저 ‘주인 없는 땅’이다”라고 서언에서 지적했다.
“이것은 댜오위다오가 여태껏 류큐왕국의 섬이 아니고 더욱이 일본의 국토가 아니라는 것을 선포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류장융은 말했다. 류장융이 장악한 자료에 따르면 댜오위다오는 일본에게 탈취 및 점령당하기 전에 절대로 “주인 없는 땅”이 아니라 중국 고유의 영토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소위 새로운 “증거”를 내세웠다. 1893년 일본 구마모토현의 이자와 야키타(井澤彌喜太)는 ‘코바지마섬(胡馬島)’(일본 측에서 왜곡한 댜오위다오 이름)으로 가다가 바다에서 조난당하여 중국 연해까지 표류하여 왔다가 구조됐는데 이것으로 중국 측에서는 일본인이 댜오위다오에 가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고 주장했다.
류장융은 “사실의 진상은 井澤가 댜오위다오에서 신천옹을 밀렵했는데 1893년 그가 댜오위다오에 쌀을 운반하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중국 저장(浙江)성 핑양(平陽)까지 떠밀려 가서 구조됬다. 그는 사람들에게 고향인 규슈로부터 야에야마까지 석탄을 운반하던 중 조난당했다고 거짓말했다.”고 말했다.
“그는 밀렵하러 가는 무인도가 중국의 섬인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만일 이 사실이 폭로되면 중국 측의 추궁을 받을까 봐 두려워했다.” 류장융은 1895년 일본이 타이완과 기타 섬에 대해 식민 통치를 시작한 후, 이자와는 장기적으로 댜오위다오에 머물고 식민지 개발을 진행하였다고 강조했다.
보고서의 사진에 의하면 1970년 7월 12일, 미국의 통제하에서 류큐정부는 사람을 댜오위다오에 파견하여 “경고판”을 세우게 하고 댜오위다오에 출입하는 타이완 어민들을 단속했다.
“이 사건은 반대로 2차 세계대전 후부터 1970년까지 타이완 어민들을 자유롭게 댜오위다오 해역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류장융은 1968년 6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78명의 타이완 직원들이 타이완 당국의 허가를 받고 댜오위다오로 가서 침몰된 배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숙소를 세웠는데 그 당시 류큐정부는 최초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보고서 기초 책임자 카라 구라요시(高良倉吉)는 보고서의 서언에서 ‘센카쿠열도’, ‘주인 없는 땅’을 제기했을 때 인용부호를 사용하고 “이 보고서가 사실을 근거로 역사를 토론하는 기초가 되길 바란다.”고 표했다.
“만일 일본 측에서 용기내어 장악한 300여개 관련 자료들을 모두 발표하고 하나씩 확인해본다면 나는 그 중 대부분이 댜오위다오가 확실하게 중국 영토에 속하지 일본 ‘고유 영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류장융은 말했다.
원문 출처: 신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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