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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승리70년) 잊을수 없는 그 날 – “7.7사변”의 전경 복원

출처 :  신화망 한국어판 | 2015-07-07 11:46:30  | 편집 :  왕범

(图表)[抗战胜利70周年·“七七事变”]“七七事变”全纪录

   [신화사 베이징 7월 7일] 1937년 7월 7일(음력 6월29일), 근대이래 중화민족의 외적 저항에서 가장 긴 침략시간과 가장 큰 규모, 가장 참혹했던 희생으로 간주되는 전쟁, 즉 근대이래 중국이 첫 전면 승리를 이룩한 반침략전쟁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역사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7월 7일 오전, 일본군은 루거우차오(卢沟桥) 이북 지역에서 훈련을 진행했다. 그날 오후, 일본군 제4대대 제8중대는 야간훈련을 진행한다는 이름을 걸고 시미즈 세쓰로 대위의 지휘하에 펑타이(豐臺) 병영에서 룽왕묘(龍王廟)로 옮겨왔다.

   일본군은 이날 밤 적막을 깨뜨렸다. 19시 30분, 일본군은 훈련을 시작했다. 22시 40분, 완핑(宛平)성 동북일본군 훈련지점에서 총성이 들렸다. 뒤이어 몇명의 일본군이 완핑성에 와 한 병사가 실종되었다는 이유로 완핑성에 대한 수색을 요구했지만 이는 중국 수비군의 거절을 당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완핑 현성(縣城)을 포위했다.

   조사해본 결과, 중국 군대는 실탄을 사격한적도 없고 실종되었다는 일본 병사의 흔적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사실상 일본군이 소위 말하는 “실종”병사 시무라 키쿠지로는 진작에 부대로 복귀했다. 당시의 중일관계 무대에서 활약적인 역할을 보여주던 마쓰모토 시게하루는 자신의 회억록 《상하이시대》에서 “루거우차오 인근의 총성”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사역병(传令兵)으로 있던 이 신병(新兵)은 부대를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에 어둠속에서 반대편 방향에로 걷다보니 귀대(歸隊)시간이 늦어졌다.” “7.7사변”의 관건적인물이자 일본군 제8대대 대대장이었던 이치키 기요나오는 1938년 6월 30일에 진행한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 병사가 이미 귀대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승인했다.

   성에 진입하여 철저히 수색하겠다는 요구가 거절되자 일본군은 즉각 총을 쏘는 것으로 반발하고 완핑성에 포탄을 발사했다. 철도 동쪽에 잠복해있던 일본군이 완핑성을 향해 경중기총(輕重機槍)과 산포(山炮)로 일제히 공격하자 중국 수비군은 어쩔 수 없이 반격을 시작했다.

   일본은 전쟁을 발동하기 위한 준비를 이미 마쳤으나 평화 회담의 이름을 내건채 군대를 배치했다. “사실 중일 쌍방의 담판이 진행되기 반시간전에 일본 측은 실종된 병사가 부대에로 복귀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실을 앞세워 견결히 완핑성에 진입할 것을 요구했다”고 셰인밍(謝蔭明) 베이징시위원회 당사(黨史)연구실 주임은 피력했다.

   8일 새벽 3시, 중국 대표는 베이핑(北平) 일본 특무기관부에서 담판을 진행했다. 4시 좌우, 중일 쌍방 대표는 완핑성에서 담판을 진행했다. 이와 동시에 타시로 간이치로 관동헌병대 사령관도 톈진(天津)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진공명령을 하달했다.

   새벽 5시, 명령을 받은 일본군은 완핑성에 대한 공격을 재차 발동하고 담판은 중단되었다. 수성(守城) 부대는 즉각 반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한시간 뒤, 일본군은 단 한보도 전진하지 못했고 사태가 예사롭지 못함을 파악한 일본측 담판 대표는 마침내 완핑 성벽(城墻)에서 백기를 들었다. 일본군은 기회를 틈타 사격을 멈추었고 쌍방은 또다시 담판을 진행했다.

   “정전협의가 부단히 체결됨과 동시에, 전투는 줄곧 이어졌다. 이는 완핑성과 노구교의 견고한 성벽 및 석교에 의지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수차례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실패했다. 그러다가 돌파구를 루거우 철교(鐵橋)와 룽왕묘 일대로 선택했다”고 셰인밍은 피력했다.

   16시, 일본 측은 중국 대표에게 성밖에서 담판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는 거절되었다. 17시, 일본은 사람을 파견하여 최후통첩을 알리는 편지를 재차 보냄으로써 정해진 시간에 중국 군대가 철퇴하라는 등 요구를 제기했다. 만족스런 답복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18시5분에 완핑성을 포격했고 이 전투는 3시간 남짓하게 지속되었다. 전원공서(專員公署)는 폐허더미로 변했고 주택들이 대량 파괴되었다.

   베이핑에 주둔하던 중국 수비군대는 긴박한 국면에 대비하여 그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셰인밍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구체적 국방사무를 책임진 진전중(金振中)은 부대에 핵심부서를 배치했다. 거만방자한 일본군의 위세에 대비하고저 그는 부대의 모든 사병들에게 밥 먹기 전과 잠 자기 전에 “전쟁의 귀신이 될지라도 망국노는 되지 않으리”라는 구호를 웨치도록 요구함으로써 국토를 보위하고 항전을 진행함에 있어서의 병사들의 투지를 격앙시켰다.

   “7.7사변”이 발생한 이튿날로 되는 7월 8일, 중공중앙은 “전 중국 동포들이여! 베이핑과 톈진이 위태롭다! 화북이 위태롭다! 중화민족이 위태롭다! 모든 인민이 일떠나 항전하는 것만이 우리들의 출로다!”라는 전보를 공개했다.

   8년 항전은 이로써 시작했다. [글/신화사 기자 천신저우(陳新洲), 샤오춘페이(肖春飛), 얜샹링(閆祥嶺), 번역/신화망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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