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사 사설: 평화와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앞으로 전진!
이는 중화민족이 영원히 명기해야 할 날이며 인류 역사상 천추에 빛날 아름다운 시문이다. 70년 전의 역사가 어제일인양 눈앞에 또렷이 나타난다.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호 순양함에서...
중국인민 항일전쟁은 처음부터 인류 문명을 구원하고 세계 평화를 보위하는 중대한 의의를 보유하고 있었고 세계 반파시즘 전쟁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었다. 중국 전장에서 장기간 일본 군국주의의 주요 병력을 견제, 저항했으며 일본 침략자의 철저한 복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중국인민항일전쟁은 전략적으로 동맹국의 작전에 협동하고 이들의 작전을 지지했으며 유럽 전장과 태평양 전장의 전략 행동에 배합해 일본 파시즘과 독일 파시즘이 전략적으로 협력하는 의도를 제약, 교란시켰다. —시진핑(習近平)(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시즘전쟁 승리 69주년 좌담회에서의 연설, 2014년 9월 3일)
중국이 없었다면, 중국이 와해됐다면, 얼마나 많은 사단의 일본군사들이 기타 지역에 파견돼 작전을 펼쳤을까?
일본 침략자의 손과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독일 침략자들이 우리 나라를 침공할 당시 두 라인에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만일 일본군이 서인도양으로 진군했다면 중동에서 우리 측의 진지 전부가 붕괴됐을 것이다. 이런 형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중국 뿐이다.
일본이 소련에 대한 전쟁을 곧바로 시작하지 못한 것은 그의 대규모 군대가 중국에 견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종료된 후 독일의 역대 대통령과 총리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독일 인민을 대표해 반성하고 사죄함과 동시에 깊이 뉘우쳤다.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의 연방독일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순난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일본에는 시종일관 침략 전쟁의 책임을 승인하지 않으려는 정치 세력이 존재해왔다. 특히 아베 신조가 2012년 총리로 재부임하면서 끊임없이 역사를 포장하고 왜곡하는 언행을 해왔다. 예를 들어 “침략 무정의”론, “전범의 영령”론 등이 그러하다.
독일 각주에서는 모두 교학 요강에 역사 시간에 반드시 학생들에게 “나치와 종족 대학살”의 내용을 강의할 것을 규정했으며 수용소, 기념관 참관을 중시할 것을 요구했다.
1953년, 일본 정부에서 “군인 은급법”을 다시 실시하기 시작했으며 전범과 비전범에게 동등한 대우를 부여했고 옥중에서 사망한 전범을 “공무로 순직”한 것으로 정했다.
독일에서 나치의 죄행을 지지하거나 부인하는 언론을 공개적 발표하는 것은 지극히 엄중한 불법 행위이다. “반나치와 반형사죄법”에서는 그 어떤 형태로 나치 사상을 선전하는 것도 금지하며 나치의 표징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규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지금까지 일본은 줄곧 일본이 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강조해 왔고 가해자로서 아시아 국가에 조성한 상해는 극구 회피해 왔다.
정부 지도자들은 전후 적극적으로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수선해 나갔으며 가장 먼저 전쟁 배상금을 지불했다. 독일은 선후로 영국, 미국, 소련, 프랑스, 이스라엘 및 폴란드, 원 체코슬로바키아 등 나라와 피해자들에게 거액의 배상과 보상을 해주었다.
침략전쟁에서 가장 엄중한 손해를 입은 나라에 대해 일본은 기본적인 존중과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1995년부터 일본 법원에서는 근 30건의 중국 민간 대일 손해 배상 청구 소송안을 심리했지만 피해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승소를 얻지 못했다.
독일은 전쟁 후 정부와 정치 제도의 신구 교체를 실현했으며 나치 독일의 죄행에 대해 철저한 숙청과 마무리를 실현했다. 나치 범죄자에 대한 독일의 추궁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일본 천황은 완전히 그 죄를 면했고 헌병대의 중요한 수령 및 전쟁에 휘말린 민족주의 조직과 대재벌들도 심판대에 서지 않았다. 일본은 심지어 재판 전에 위안부 제도 관련 문건을 전부 소각하기도 했다. 일부 전범은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