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한국에 갔던 그 해, 한류스타 이은주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 한국을 떠나던 해에는 실력파 배우 정다빈 씨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통계를 살펴보면 최근 10년 새 한국에서 서른명이 넘는 연예인들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고 한다. 한국 연예인들의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 보면 매우 놀라운 숫자였다. 반면 중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런 소식을 자주 접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난 런차오량(喬任梁)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그 어느 때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이은주 사진/바이두(百度)
중국과 한국을 막론하고 연예인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가장 큰 원인은 보통 ‘우울증’인 경우가 많다. 이는 “내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병마가 나의 의지를 모조리 꺾어놓았기 때문”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자살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래서 떠난 자와 남아있는 자 모두 자살의 원인으로 지목될 만한 무언가를 찾아 ‘핑곗거리’로 삼곤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살한 사람들이 우울증이라는 명확한 의학적 진단을 받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개 사후에 가족이나 지인, 대중매체에서 우울증세를 보였다고 ‘추정’을 할 뿐이다. 사실 어떤 증세를 우울증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고 엄밀한 과정이 필요하다. 세계 여러 나라의 보건법에서는 심리상담사가 “우울증 환자를 치료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이를 대신해 “우울증세를 보이는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게다가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힘겨운 선택을 할 때에는 그 이면에 숨겨진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고(故) 장자연 씨는 자신이 믿던 정의가 연예계의 ‘불문율’에 짓밟히자 죽음을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밖에 없었고, 고(故) 최진실 씨도 죽기 전 가정폭력에 이어 사채 때문에 친구의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누구나 살면서 억울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고, 어려움과 고비도 피해가기 어렵다. 하지만 같은 연예계인데 어째서 중국과 한국 연예인들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이처럼 크게 차이 나는 것일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양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문화적 심리를 분석해 본다면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학자들은 한국인 감정의 바탕을 설명할 때 ‘한(恨)’이라는 말을 즐겨 쓰곤 한다. ‘한’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원망하는 감정이 아니다. 여기에는 꽤나 뿌리 깊은 역사적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한반도는 수백 수천 년 전부터 줄곧 강대국 틈새에 끼어 침략을 받았거나 침략의 위협을 일상적으로 겪어왔다. 분노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열사들의 희생 정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침략자들과 수차례 싸우며 저항도 해 봤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고 저항의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다. 결국 한(韓)민족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을 지켜보며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속 저편에는 언제나 굴종하지 않겠다는 민족의 오기가 서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한’의 정서다.
한국사람들은 모두 이런 ‘한’의 정서를 갖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비애감’이다. 죽음에 대해 일본인처럼 자살에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국인처럼 자살을 무조건 용인할 수 없는 ‘못난 행동’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동시에 이런 ‘한’ 때문에 한국인들은 좀 더 예민한 사고와 격정적인 정서를 갖게 됐다. 필자도 한국에 막 살기 시작했을 무렵 이와 관련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한 공개석상에서 필자의 아내가 과거의 일을 얘기하다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당시 필자는 이 광경을 보며 가만히 굳은 채로 앉아 테이블에 놓인 휴지를 건네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한국 친구 한 명이 테이블을 돌아 휴지를 집어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한국 친구가 그때의 일화를 꺼내며 필자를 가볍게 나무랐지만, 필자는 이미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억울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필자를 비롯해 주변의 중국인들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참고 억누르라고 교육을 받아 왔다. 그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 감정에 대한 체득력이나 표현력도 항상 억제하는 편이다. 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추악한 일들을 꾹 견뎌내는 것은 물론, 자기 내면의 고통도 제어하다 못해 아예 ‘못 본 척’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니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르지 않는 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필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
감정에 다소 서툴고 예민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죽음은 비통한 일이다. 게다가 슬프지만 아무리 진심을 다해 돕고 싶어도 이미 죽음을 결심한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러니 앞으로 당사자가 선택한 이런 죽음을 목도할 기회가 있다면, 최소한 이를 비하하거나 조롱하지 않도록 스스로 단속을 잘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단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글/ 왕위안타오(王元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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